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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저리 이야기
11.2 청년부 취재기행
- 저* *
- 조회 : 384
- 등록일 : 2025-12-03


(취재 준비 중인 청년부... 매일같이 현장 왔다갔다 하니 이젠 길바닥도 제 안방마냥 아무렇게 퍼질러 앉는다)
올해 봄이었다. 세저리에 입학할 때가. 이때만 해도 기자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전국 누비면서 현장 다니고 사람 만나는 게 일이니, 기자가 되면 명소를 꿰게 될거라고. 그러니 나도 세저리에서 취재 실습 다니며, 전국 각지의 명소를 알게 될 거라 생각했다.
헌데, 실습을 해보니 기자 일이란 게 그렇다. 일단 아이템 잡는다. 자료 수집하고 공부한다. 벌써 진 빠진다. 현장에 가거나 사람 만난다. 혼이 나간다. 학교로 복귀해 기사 쓴다. 기가 빠진다. 출고한다. 맥 빠진다. 녹초다. 노동 강도가 만만찮은 직업이다. 그러니 명소를 다닐 기회는 커녕, 맛집이나 신상 카페 갈 겨를도 없다. 오죽하면 부산대에서 극우 집회를 취재할 때, 코 앞에 있는 바다 한 번 못 봤을까.
재주 좋은 동료들이나, 기자, PD를 수십 년 해온 교수님들은 일 걸어놓고도 틈틈이 여행을 다니는 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렇다. 서울, 부산, 대구, 전주, 인천, 속초···. 여러 곳을 돌았지만 여행 기분이나 내며 여유 부릴 기회가 한 번도 없었다. 그저 '언젠가'만 기약했다.
그 '언젠가'가 지난 11월 2일(일)이었다. 큰 기획을 진행 중인 청년부가 취재 차 제부도를 찾았는데, 1박2일 동안 바다도 보고, 낙조도 봤다. 마침 일정 때문에 제부도를 찾은 안수찬 지도교수님도 합류했다. 같이 밤늦게 얘기도 나누고, 윷놀이도 했다. 거령 맞아 보이고, 애초에 여행이 아닌 취재로 찾은 섬이지만, 우리에겐 이런 게 여행이라면 여행이다. 그래서 이번 세저리 이야기를 '취재기행'이라 부르고 싶다.

(방지턱이 유난히 많던 궁평항로)
경기도 화성에서 북쪽으로 쭉 뻗은 궁평항로를 타고, 왼쪽엔 서해를 낀 채 1시간을 달린다. 운전수가 지칠즈음, 화성시와 제부도를 연결하는 유일한 길이자, 해수면과 거의 맞닿아 있는 2차선 도로가 눈에 차오른다. 이 길의 양 옆엔 서해바다. 그래서 이 길은 '모세의 기적'이라 불린다. 햇빛을 튕겨내는 잔잔한 바다, 바다에서 솟아 하늘로 향하는 풍력발전기, 그 발전기 사이를 오가는 케이블카···. 아름다운 풍경에 신이 시샘했는지, 맘 놓고 운전하기엔 다소 아찔한 도로다. 그러건 말건, 차 안은 찍사들로 난리다. 삼삼오오 창문을 열고 아름다운 풍광을 담는다.

(제부도 전경)
오후 2시쯤, 바다가 보이는 숙소에 도착했다. 깨끗하고 넓은 펜션이었다. 우리는 낙조와 안수찬 교수님을 기다렸다. 이들은 두 시간 뒤에 보게 될 것이다. 그 사이에 세빈, 서정은 편의점 가고, 여진은 과제하고, 관우는 음악과 풍경을 즐기고, 전설은 방바닥에 자빠져 한숨 잔다. 난 그 사이에 제부도에 서린 배경을 찾았다.

(숙소에서 바라본 전경. 참 좋다. 참고로 세빈이 예약한 숙소다)
제부도는 예부터 육지에서 멀리 바라보이는 섬이란 뜻에서 '저비섬' 또는 '접비섬'으로 불렸다. 조선 중기 이후 송교리와 제부도를 연결하는 갯벌 고랑을 어린아이는 업고, 노인은 부축해서 건넌다는 의미에서 '제약부경'(濟弱扶傾)이라는 말이 구전으로 전해졌다. 여기서 '제'자와 '부'자를 따와 '제부리'(濟扶里)로 개칭됐다고 한다.
하루에 2번 이뤄지는 간조 때만 이 섬은 육지와 연결된다. 매일 고립과 연결이 반복되는 이곳 주민들은 농어업에 종사하다가, 지금은 관광업으로 먹고 산다. 그래서 길마다 늘어선 가게에 조개니, 홍게니 차려놓고 길손 기다리다 누가 지나갈 때마다 큰소리로 외친다. "6명? 싸게 해드릴게, 얼른 들어와요!"
일정을 끝내고 숙소에 온 교수님이 합류했다. 우린 일몰을 보러 갔다. 일몰 명소는 숙소에서 10분 떨어진 곳에 있는 빨간 등대다. 그곳으로 향하는 길. 교수님은 기자들에게 지난 발제 피드백을 한다. 등대까지 가는 10분, 지옥과 천당을 오간다.

(선두에서 교수님이 전설에게 피드백 중이다. 그 다음 타자, 현하, 여진...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
4시를 조금 넘겼다. 빨간 등대 따라 조성된 산책로는 낙조를 배경으로 뺨 부비며 사진 찍는 연인, 부부로 가득하다. 이곳에 머쓱거리며 들어서는 청년 6명과 중년 남성 1명.

(청년부 화이팅!)
(찍어주신 분, 감사합니다)
우리는 수평선으로 넘어가는 해를 하염없이 바라봤다. 질리도록 아름다운 풍광이 고맙고, 이 풍광을 함께 보고있는 청년부가 고맙고, 이것을 볼 수 있게 된 내 기자 팔자가 고맙고···. 여튼, 모든 게 고마울 따름.

(그림 같은 풍경도 제부도 주민들에겐 일상이겠지...)

(청년부 화이팅! 2)
(찍어주신 분, 감사합니다 2)

물이 잠깐 빠져있는 틈을 타 뻘로 내려갈 수도 있었다.
전설 부장의 제안으로, 타임랩스 켜놓고 다같이 점프를 했다.
다들 뛰는 모습 참ㅋㅋㅋ

(한 컷에 담기지 않을 정도로 푸짐한 상이었다)
잡생각을 바다에 흘려보내고는, 세빈이 찾은 식당으로 향했다. 들어서기 전부터 떠들썩한 기운이 흐른다. 어림잡아 150평 되는 식당에 100명 가까운 손님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우린 조개구이니, 새우구이니, 목살이니 이것저것 다 시켰다. 숯불에 올라간 이것저것들은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사라졌다. 그럴만도 한 게, 다들 새벽 4시에 일어나 지금까지 한끼만 먹고 버텼으니.

(새우 헌터 세빈. 새우 앞에선 지도교수고 나발이고...)


(관우와 서정이 끓인 라면. 또 먹고싶다.....)
숙소. 이 순간만큼은 연락 다 끊고, 취재니 출고니 저널리즘이니 모두 제쳐놓고, 사랑, 이별 같이 맺힌 속내를 털어냈다. 이 과정에서 안수찬 교수님의 과거 증언을 따기도 했다. 아무도 기록은 안했다. 그래도 청년부 모두는 기억한다. 집요한 추궁 끝에 얻어낸 증언이었다. 이번 취재기행에 옮기진 않았다. "역사는 묻지 않는 자에게 대답하지 않는다."

교수님이 갖고오신 윷놀이. 처음엔 재밌었는데 교수님만 계속 이겨서 나중엔 재미없었다.
내일도 취재 일정이 있지만 이때 아니면 언제 놀겠는가. 청년부와 밤이 깊어간다. 온밤을 꼴딱 세운다. 낭만, 기자의 동력이라 했던가.
추억은 여기까지
다음 여행을 위해
다음 취재를 위해
미련없이 기억창고를 비운다
우리가 떠난 제부도는 이제 우리 것이 아니다
그래도 바람이 있다면
언젠가 이 사람들과
다시 먼 길 여행 떠날 수 있길
참한 삶 배울 수 있는 동료들
내가 기자하려는 까닭일지도

(2025.11.02)